[에세이] 사랑하겠다는 의지 (장문주의)

25 근육빵빵 | 2019-08-25 14:43:40 | 조회 : 233 | 추천 : -


사랑하겠다는 의지

 

 

 대학교 2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생활비 마련 차원에서 수학 과외를 했었다. 한 명밖에 안 맡았지만 1년 반 정도를 했으니 꽤나 오랫동안 가르친 셈인데실상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때마다 해고 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외 선생으로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어느덧 과외 선생이 아니라 학생과 할 말못 할 말 안 가리고 주고 받는 베스트 프렌드가 됐기 때문이다. (학생 부모님껜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학생과 온갖 일상을 서로 공유하는 사이로 지내면서 나는 많은 것을 알게 됐는데, 이 학생은 관심사가 너무 수시로 바뀌었다. 과외 초기에는 I.O.I 김세정에 빠져서 5분마다 근데 김세정 너무 예쁜 거 같아요.” 라면서 수업을 끊어먹더니한 달도 못 돼서 트와이스로 갈아타버렸다페이스북에 트와이스 게시글에만 좋아요를 도배해놓고 방에는 친구에게 구매한 트와이스 포스터까지 붙여놓았다. 심지어는 "이번 시험 진짜 성적 떡상시키겠습니다."라는 제갈량급 출사표를 던지며 트와이스 정규 앨범을 대리구매해달라고 부탁까지 해왔다. 나는 부탁을 들어주었고, 앨범을 건낸 순간 출사표는 공중분해됐다. 


 계속해서 그런 날들이 이어졌다. 나에게 일본 애니 시청을 강요하다가, 수업 중에 침 튀기며 혼자 비트박스를 하다가, 갑자기 수학이 재밌어졌다며 한 3일 공부하다가, 자기는 국어를 제일 좋아한다며 수학은 손절하더니 국어에서 5등급을 받아왔다여느 때처럼 내 말끝마다 트와이스 얘기를 꺼내며 수업을 방해하던 날나는 괜히 한마디 쿡 찔러보았다.

선생님이 보면 넌 좋아하는 게 맨날 바뀌는 거 같아아이돌도 바뀌고취미도 바뀌고좋아하는 과목도 바뀌고.”

그러나 가볍게 던진 질문에 학생은 꽤나 골몰히 생각에 잠기더니 내 질문을 되받아쳤다.

“그러게요. 저 왜 이럴까요, 쌤.

 

 그 되받아치는 물음에 선뜻 당황하고 말았다. 학생이 내 질문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는 듯, 자신의 변덕스런 기질이 사뭇 걱정되는 표정이었다. 결국 "이 X끼는 진짜 왜 이러냐...." 싶어 던진 내 질문은 "정말 왜 그러는 걸까?"라는 진지한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내가 수학을 기깔나게 가르쳐주진 못했지만 이 질문만큼은 답을 해줘야 할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먼저 혼자 학생의 질문을 여러가지 상황에 요리조리 대입해보았다. 이 고민이 연애 고민이었다면 어땠을까? 선생님저는 사귀고 싶은 여자가 맨날 달라져요.” 라고 내게 질문했다면? 이 놈이 여자 꽤나 울리고 다녔을 놈이었다면 "기만자 X끼야 입 닥쳐!"라고 혼자 불타오르며 의문의 1패를 적립했을 것이다. 하지만 학생과 나 둘 다 사이좋게 찌질이 짝사랑 전문가였고, 그런 입장에서 보았을 때 심각한 고민인 것은 맞아보였다. 왜냐하면 이 고민은 저는 늘 누군가를 끝까지 사랑하는 데에 실패해요어떻게 사랑해야 하나요?”라는 고민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누군가와 오래토록 사랑해보고 싶지만 자기 자신이 너무 변덕스러워 그럴 자신이 없다는 마음을 반증한다. 스스로에게 싹튼 불신은 그 씨앗이 아무리 작다한들 결국 단단하게 뿌리내리게 되어 있다. 


 이럴 때 나의_소싯적_현란한_연애썰.txt를 풀어주며 인생 선배 노릇할 수 있었다면, 좋겠다만, 내 연애 경력과 범죄 경력이 별 차이가 없다. 결국 내가 믿을 건 책 뿐이다. 씁쓸함을 감추며 또다시 책장을 뒤적거려 보았다. 그때 내 책장에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튀어나왔다. 


사랑의 기술.jpg

 


 


사랑의 기술』에는 현대인의 사랑이 어떻게 무너졌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그 중 가장 첫 번째로 언급되는 문제점은 현대인은 어떻게 사랑받을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을 뿐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는 관심이 없다는 얘기다. 당장 인터넷만 검색해봐도 알 수 있다. 온갖 ‘남친룩’, ‘여친룩’ 같은 패션 코디와 뷰티 제품들, 연애 전문가를 자처하며 여사친과 썸 타는 법’, ‘남사친에게 여자로 보이는 법과 같은 꿀팁을 전수하고자 하는 사람들, 페이스북에 올렸다 하면 좋아요가 5,6천개는 넘는 여자친구에게 사랑받는 법’, ‘남자친구에게 좋은 여자 되는 법’. 모두 자신이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 보이는 지를 알려주는 것들이다. 하지만 다들 자기가 어떻게 하면 사랑받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만을 알려주려고 하지, 어떻게 하면 사랑을 잘 주는 것인지는 얘기하지 않는다. 우리의 관심은 여태껏 사랑을 받는 정도였지, 사랑을 주는 정도가 아니었던 셈이다.

 

 이런 류의 꿀팁들은 내 과외 학생과 같은 문제에선 무용지물이 돼버린다. 왜냐하면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사랑을 잘 하고 싶고 계속해서 사랑해주고 싶은데,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이 자꾸만 바닥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떻게 받을 것인가의 문제는 개입되지 않는다. 결국 쏟아지는 꿀팁들이 쓸모없어지는 순간, 우리는 사랑하고 열망하는 마음을 지켜내지 못하고 쉽사리 무너져버린다. 분명히 내 학생도 공부를 마냥 싫어하지만은 않았다분명히 수학이 재밌을 때도 있고문학이 감동적일 때도 있다그러나 공부에겐 사랑받을 필요가 없었고, 사랑을 주는 것만이 가능했다. 그리고 받는 법이 아닌 주는 법은 고민해본 적이 없으니 공부는 금세 때려치웠다. 연예인 덕질을 하는 것도, 애니를 왕창 보는 것도, 모두 받는 사랑없이 온전히 자기가 가진 사랑으로 이어나가는 것들이다.

 

 물론 무정한 자식도 끝내 품어주는 부모님의 마음처럼 주기만 하는 사랑의 롤모델도 있다. 하지만 김세정에서 트와이스로 갈아탄 학생에게 부모님의 사랑을 들먹일 순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에리히 프롬의 생각은 어떤가사랑의 기술에 실린 그의 생각은 아주 간단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강렬한 감정만이 아니다그것은 결의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다.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면 상대방을 향한 열망설렘순수와 같은 감정을 상상하곤 한다권태기에 빠진 두 연인이 싸우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넌 나에 대한 사랑이 식었어.” 연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단골 멘트다그러나 사랑의 기술이 말하는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내게 일었을 때 그 감정을 끝까지 지켜낼 것이고그래서 내 힘이 닿는 한 끝까지 사랑하리라는 결의이고 판단이며 약속이다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지이다사랑은 감정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으며의지로써 사랑을 지켜내야만 한다. 거꾸로 말해,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가 식었을 때 끝이 난다.

 

 어느 팟캐스트 방송에서 한 심리학 교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결혼 생활 2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아내나 남편에게 가슴이 떨린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심장병이다.” 다소 과격한 코멘트로 들리지만여기에는 사랑은 결코 설렘 같은 감정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라는 나름의 통찰이 담겨있다비단 부부 생활뿐이겠는가우릴 사랑에 빠지게 한 모든 것들이 처음에는 감정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학창시절 우연히 보러간 연극 한 편에 심장이 뛰어서 누군가는 배우가 됐을 거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 한 곡이 전설적인 가수의 탄생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감정이 모두 소진되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오고야 말고수많은 사람들이 그 순간을 방황한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여태껏 상대방의 마음에 불씨를 지펴 사랑받아 왔다면 이제는 당신 마음에 타오르는 불씨를 어떻게 지켜낼지 고민하라고. 이를 지켜낼 의지가 있느냐고, 지켜내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으냐고 말이다. 

 

 김소연 시인의『마음사전』에서는 '짝사랑'을 '엄밀히 말하자면, 세상 모든 상처들은 이것들의 선물' 이라고 정의한다. 이 구절을 읽다가 문득 내 과외 학생이 연예인이니 공부니 보상받지도 못할 짝사랑을 시도하며 알게 모르게 상처가 쌓였던 건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아직 그 아이의 가슴에서 불타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배우라는 꿈이다. 내가 과외에서 짤리고 나서 학생이 바로 연기학원에 등록했다. 매일 3시간씩 학원에서 강행군을 하는데도 재밌단다. 자기는 원래 남한테 관심받는 걸 좋아했다고, 자기한테 연기가 딱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한 마디 건내주었다.

"연기는 어디 끝까지 한 번 좋아해봐. 계속 좋아하려고 노력도 해보고."

그러자 "쌤도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노력해보세요."라며 이제는 내 걱정도 해주었다. 연애도 못해본 선생님을 둔 제자가 어느덧 무언가가를 사랑할 줄 알게 되고, 사랑하는 법을 알려줄 수 있게 된 것 같아 참으로 오묘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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