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 아서 밀러 [3]

21 수줍은질럿 | 2020-05-18 16:02:34 | 조회 : 219 | 추천 : -



02-2 시련.jpg

 


 

 

 

1.

올해 2월, 이 책을 읽었다. 어떤 독서모임의 지정도서로 지정되었기에 읽게 되었다. 잘 읽히지 않아 미루고 미루다가 모임 당일날 몰아치듯 읽었다.




2. 아서 밀러

<시련>을 쓴 사람은 미국 태생의 작가 아서 밀러(Arthur Asher Miller, 1915 ~ 2005). 이 사람이 쓴 <세일즈맨의 죽음>이 <시련>보다 더 유명할 것이다.


문제는, 나는 고등학생 때 <세일즈맨의 죽음>을 읽었는데 굉장히 지루하게 읽었다는 것이다. 내가 미국 문학을 싫어하는 것도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세일즈맨의 죽음>은 최악이었다. 한 가족이, 특히 가장(家長)인 아버지가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그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인 건 알겠는데, 그 이상의 의미는 느껴지지가 않았다. 빤한 내용을 길게 늘여쓴 느낌이었기에, 나는 아직도 이 책을 '재미없게 읽은 책 중 하나'로 기억하고 있다.




3. <시련>

<시련> 또한 쉽게 읽히지 않았다. 주된 키워드는 '마녀사냥'이다. 척박한 환경과 불충분한 정보 속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죄인으로 낙인찍혀 고통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중세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것은 고등학교때 읽었던 어떤 책*을 통해서 접한 적이 있다. 그리고 영국 청교도들이 대서양을 건너 도착한 미국 대륙에서도 '마녀사냥'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서문에서 아서 밀러는,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짜깁기하여 재구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 <내 목은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당시에는 나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이 읽으라고 하여 열심히 읽었다. 나름대로 재미있었고 모르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토마스 모어나 드레퓌스, 그리고 마녀사냥 등이 기억난다. 하지만 지금 누군가 내게 이 책을 읽으라고 추천한다면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을 쓴 저자는 다름아닌, (정치적으로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박원순씨이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옹호되기도 하고 지나치게 비판받기도 하는 사람의 책은 읽기가 꺼려진다.


내가 이 책에 대해 그렇게 좋은 인상을 가지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이 책이 단지, '잘못된 과거에 대한 고발하는 책'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아픈 과거는 알겠고, 초기 미국에 그런 갈등의 씨앗이 있었음은 그동안 알지 못했다가 이번에 알게 되었다는 것, 그것에 불과하다면 도저히 나는 이 희곡에 좋은 인상을 가지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마치 <세일즈맨의 죽음>이 단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 불과하다고 느껴져서 '그냥 그정도뿐인 책'이라고 생각했듯이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소설가 하근찬님의 <수난이대>를 미국 사람이 읽었다면 어떨까? 한국전쟁의 아픔과 그로 인한 후유증을 당시의 한국 사람들이 겪었다는 사실 정도는 이해할 지 몰라도, '공감'은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만이 겪은 그 특수성은 보편적으로는 이해될 수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비슷한 전쟁을 겪은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라면 <수난이대>로부터 공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더구나 나는 이러한 소설 혹은 희곡에서 흔히 드러나는 '교훈적인 느낌'이라든지 '영웅성'이 싫다. <수난이대>에서 다리가 성치 않은 아들이 팔이 성치 않은 아버지에 업혀 다리를 건너는 모습은 자못 감동적이다. 고난을 딛고 일어난 희망을 상징하는 멋진 장면이다. 또 <시련>에서 자일스 코리 영감이 묵묵히 시련을 견디는 것, 자식과 가족들에게 행여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코리 영감 부부가 극한 상황에서도 서로를 챙기는 모습은 타의 모범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를 접하는 독자의 입장으로서 나는 왠지 자연스러운 느낌을 얻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행동을 계속해서 저지르는 보바리 부인이나 카레니나 부인의 모습, 계속해서 끝도 없는 불행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잔과 테스의 모습, 사회적으로는 실패한 인생을 살지만 내적으로는 계속 성숙해나가는 크눌프와 골드문트, 싯달타의 모습, 부조리에 저항하지만 극복하지 못하는 뫼르소와 리외의 모습, 우유부단한 햄릿이나 무분별한 돈키호테의 모습.** 이런 데서는 나는 어떤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나도 저런 적이 있는데, 나도 저런 면이 있는데, 저 인물도 마찬가지이구나'하는 어떤 보편적인 감정을 느끼고 해당되는 인물에 공감하게 된다.

**플로베르, <보바리 부인>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 모파상, <여자의 일생> / 하디, <테스> / 헤세, <크눌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싯달타> / 까뮈, <이방인>, <페스트> / 셰익스피어, <햄릿> /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 여기에서 <페스트>에 나오는 리외는,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바람직한' 인물상이다. 하지만 <페스트>에서 리외는 영웅적으로 묘사된다기보다는, 오히려, 리외가 겪는 끊임없는 부조리가 강조될 뿐이다. 


반면에, <시련>이나 <수난이대>에서는 너무나도 극한적인 상황을 상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상황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어떤 교훈적인 메시지가 강요되듯 드러난다. 선악의 구도가 분명하고, 소설 속 인물들은 자동적으로 '피해자'가 된다. 지나치게 특수한 상황과 공간 속에서 인물들은 그 상황에 맞는 전형적인 모습을 드러낼 뿐인 것이다.


예를 들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 나오는 주인공 요조는, 굉장히 특이한 인물이다. 하지만 요조가 드러내보이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살 만하다. 또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레빈은 꽤 교훈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수많은 사건과 묘사를 통해 드러난 레빈의 감정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하지만 <시련>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은 단지 '전형적'일 뿐이며, 그래서 각각의 인물들에 대해 그렇게까지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이다. 내 감상은 그렇다.




4. 마녀사냥

다만, '마녀사냥'이라는 단어, 혹은 개념은 보편적인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중세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있었고 초기 미국에서 마녀사냥이 있었듯, 현재 우리나라 사회에서도 마녀사냥은 존재한다. 빠르게 판도가 바뀌는 세상 속, 특히 인터넷 세상 속에서 어떤 사람은 순식간에 악인이 되어버리고 네티즌들의 뭇매를 맞는 것이다.


힘든 세상 살이 속에서 사람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진다는 것 또한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과 꽤 닮았다. 세계에서 가장 근면한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야근이 일상인 직장인들은, 척박한 땅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세일럼 마을 주민들과 닮았다. 자주 편을 갈라 싸우는 우리나라의 남자와 여자, 어른과 젊은이의 모습은 세일럼 마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갈등과 닮았다.


<시련>을 읽으니 지나친 갈등을 피해야겠다는 생각,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일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면은 있다. 이렇듯 '교훈이 있는 소설'이 아닐까.




5.

계속해서 비판만 하다가 마지막엔 좋은 소리를 한 것 같아 이상한 글이 되어버린 듯하다. 짧게 요약하자면,

(1) 역사 고발적, 교훈적인 희곡.

(2) 굉장히 특정한 상황이 주어져 있음. 선과 악의 구도가 분명했음.

(4) 개개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공감을 느끼기기는 어려웠음.

(5) 다만, 극에 등장하는 사회의 모습은 현재 우리나라 사회와 닮은 점이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듯.


분량 

★★☆☆☆


난이도

★★☆☆☆


재미

★★☆☆☆




독서/서적

< 1 2 3 4 5 >
독서/서적의 TODAY BEST
추천된 글이 없습니다.
조회된 글이 없습니다.
댓글이 달린 글이 없습니다.